한국의 수출통제에 "우리 대응에 놀라지 말라" 경고했던 러시아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북 지원과 선교 활동을 하던 한국인 백모씨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것에 대해 러시아 관영 매체들은 일급 기밀정보를 외국에 넘긴 간첩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실상은 최근 급격히 악화된 한·러 관계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백씨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탈북민 지원과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관련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했지만 남아서 활동을 지속했던 선교사들도 있다"면서 "백씨도 그 중의 한 명일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 |
러시아는 과거 탈북민 문제 등에서 한국에 비교적 협조적인 나라였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탈북민에 대해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한국으로 송환하는데 협조하기도 했다. 대북 지원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적발되도 벌금이나 추방 등 가벼운 처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한·러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북한과 러시아가 밀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한국인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체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 언론들은 백씨가 체포된 시점이 올해 초라고 보도하고 있다. 보도가 맞다면 시기적으로 한국이 러시아에 대한 수출통제를 강화한 직후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26일 미국 주도의 대(對)러시아 수출 통제 공조를 위해 682개 품목을 상황허가 대상에 추가하는 내용의 '제33차 전략물자 수출입 고시' 개정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에 러시아는 "한국이 서방의 불법적 반러 제재에 동참했다"면서 강하게 반발하며 보복을 예고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당시 "우리는 대응 조치를 취할 권리를 가진다"며 "이 조치가 반드시 대칭적이지는 않을 것이고 (한국이) 나중에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자하로바 대변인이 공언한 '한국이 놀랄 만한 비대칭적 대응 조치'가 백씨 체포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 [사진=러시아 외교부 홈페이지] |
러시아는 지난달 한국 정부에 백씨 체포 사실을 통보하고 물밑에서 논의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지난 11일 관영 매체를 통해 갑자기 사건을 보도한 것은 앞으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뤄나갈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백씨 처리 문제를 한국의 러시아 제재 동참이나 우크라이나 지원등 한·러 관계의 핵심적 쟁점과 연계해 한국 정부를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이번 사건이 북한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다. 대북 사업과 연관이 있는 한 소식통은 "북한이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교사와 대북 지원 단체에 대한 단속을 러시아 당국에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외교부도 이번 사건을 단순한 형사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있다. 외교부는 러시아가 백씨 구금 사실을 공개한 이후 이와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기자들의 질문에도 "지금 상황에서는 확인해줄 것이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는 답을 되풀이하고 있다. 자국민이 외국 수사당국에 의해 구금된 사건에 대해 이처럼 '로키 대응'을 하는 것은 이번 사건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가 과거와 달리 연해주 지역에서 한국의 활동가들이 탈북민 구출 등 대북 지원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강경 대응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